얼마 전, 서울대입구역의 번잡한 공기 속에서 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 두 분이 다가와 내 손에 전단지 한 장을 쥐여주며, 나지막이 인터넷 검색을 권했다. 그 빛바랜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필자는 종교가 가진 오랜 질문을 다시금 떠올랐다. 종교의 궁극적 지향은 만인의 복락에 있다. 이 자명하고도 숭고한 명제 앞에서, 과연 오늘날의 종교는 얼마나 당당하게 가슴을 펼 수 있는가.
우리가 성경이라 부르는 거대하고 울창한 텍스트의 숲을 거닐다 보면, 그곳이 신의 친필 사인으로 가득 찬 무결점의 낙원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도리어 그곳은 압도적인 신성이라는 거대한 절벽 앞에 선 인간들이, 절망 속에서 부르짖고, 두드리고, 끝내 그 신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보려 했던 처절한 고뇌의 퇴적층이다. 성경이 악의 범람 앞에서, 전쟁과 학살, 약탈이라는 인간의 참혹한 비극을 때로 침묵하거나 무책임해 보이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 책은 완성된 답을 하사받은 신의 비서들이 받아 적은 신탁이 아니라, 답을 몰라 전전반측(輾轉反側) 하던 인간들의 떨리는 손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전능한 신이 고통을 방관한다는 신정론의 모순 앞에서, 어떤 기록자들은 종교적 논리로 고통을 미화하거나 해답을 사후 세계로 유예하며, 인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회피의 행로를 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의 촘촘한 행간에는 권력의 문법으로 꼼꼼히 편집된 억압의 언어만 고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단단한 도그마의 균열을 뚫고, 고통받는 자들이 울부짖는 해방의 서사가 격렬하게 분출하고 있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정치적 효율을 위해 예배일을 조정하고, 여성을 배제하는 가부장적 교조가 정전의 권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끊임없이 기득권의 성벽을 흔들며 고난받는 이들의 편에 섰던 혁명적 인간애를 동시에 품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하늘에서 떨어진 완성된 해답지가 아니다. 인간이 신을 향해 던진, 가장 뜨겁고도 치열한 질문들이 격돌하는 전장 그 자체다.
이러한 신학적 땅 위에서, 성경적 근거를 바탕으로 원죄라는 개념을 체계화한 결정적인 인물은 4세기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아담의 타락을 인류 본성의 근원적 부패로 규정하며 오직 은총을 통한 구원을 역설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가 정립한 원죄를 생물학적 오염이나 혈통적 저주로 해석하는 전근대적 오류에서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 신학적 지평에서 바라본 원죄란, 피를 타고 흐르는 유전적 낙인이 아니라 절대적 선과의 단절로 인해 발생하는 실존적 자기중심성이다. 이는 현대 인지과학이 상정하는 마음의 이론, 즉 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치환하는 공감 능력의 상실과 고통스럽게 궤를 같이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라는 좁은 세계에 고립된 불완전한 존재로 시작한다. 이것은 인간을 단죄하기 위한 굴레가 아니라, 우리가 왜 타인의 아픔에 이토록 무감각해지며 끊임없이 타자와 충돌하는지를 설명하는 실존적 정의에 가깝다. 그러므로 죄의 반대말은 거룩함이 아니라 공감이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던 사도 바울은 구원의 조건이 혈통이나 가문이라는 사회적 자본에 있지 않고, 오직 개별적인 믿음에 있다고 선언했다. 이는 오늘날 신의 이름으로 부를 축적하고, 혐오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일부 종교적 특권주의의 심장을 찌르는 서늘한 경고다. 구원의 지혜는 결코 특정 종교 지도자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신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타자를 배제하고 선을 긋는 순간,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라 세속의 잔인한 폭력일 뿐이다. 종교가 가장 경계해야 할 눈먼 상태는, 교리라는 좁은 슬릿으로만 세상을 재단하는 외눈박이의 신앙이다. 종교가 말하는 진정한 행복은 고통이 소거된 자리에 오는 안락함이 아니라, 고통의 한복판에서도 삶의 고귀한 가치를 길어 올리는 실존적 사회운동이어야 한다. 현실의 부조리를 외면한 채 사후의 보상만을 미끼로 던지는 종교는, 그 생명력을 상실한 채 대중을 잠재우는 종교적 마취제에 불과하다.
이제 종교는 화려한 교회 건물과 박제된 교리, 그리고 신비로운 영적 체험이라는 명분 아래 화석화된 제단에서 내려와야 한다. 신이 계신 거룩한 성소 앞에 엎드려 무미건조한 기도를 반복하는 것보다, 홀로 어둠 속을 걷는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의 손길이야말로 종교의 본질에 훨씬 더 가깝다. 신의 자리인 저 높은 곳의 고립된 성전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흐르는 처연한 인류애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화석화된 문자를 넘어 인간의 존엄을 향해, 신이라는 거대한 절벽을 주체적으로 두드리는 믿음이 회복될 때 종교는 제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진정한 믿음이란 인간을 가두는 배타적인 울타리가 아니다. 그것은 행복이라는 이름마저 불확실한 거친 길 위에서, 서로의 체온에 어깨를 기대며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묵직한 지팡이와 같은 것이다. 신이라는 벽에 새겨진 그 수많은 인간의 지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다.
박범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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