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1945년 8월 15일, 만주 벌판의 지평선 위로 솟아오른 태양은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공기는 이미 요동치고 있었다.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 일왕의 항복 선언. 그 짧은 문장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만주 안동현의 허름한 가옥에 은신하던 문윤국(文潤國)은 낡은 성경책을 떨어뜨렸다. 26년의 망명 생활, 아홉 번의 사선을 넘나든 끝에 마주한 '빛의 회복(光復)'이었다.
"주여, 마침내 보게 하시나이까"
문윤국은 무릎을 꿇었다.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정주 장날의 함성보다 깊었고, 만주의 눈보라보다 매서웠다. 그는 품 안에서 소중히 간직해온 수건 뭉치를 꺼냈다. 1921년 압록강을 건너며 움켜쥐었던 고향 정주의 흙이었다.
“이제 돌아가리라. 이 흙을 다시 정주의 산천에 뿌리고, 오산학교의 아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리라.”
그는 떨리는 손으로 흙을 어루만지며 통곡했다. 하지만 그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방의 소식과 함께 들려온 또 다른 소식은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38선이라는 거대한 장벽의 등장이었다.
정주로 향하는 길, 가로막힌 고향의 하늘 문윤국은 즉시 고향 정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 도착한 북녘의 땅은 그가 꿈꾸던 독립국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붉은 군대의 군홧발 소리가 정주의 평화로운 거리를 메웠고, 신앙과 자유를 목숨처럼 여겼던 그에게 공산주의 체제의 등장은 또 다른 거대한 압제로 다가왔다.
고향 정주 근처까지 갔음에도 그는 차마 집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이미 지주와 종교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조국은 찾았으나, 내 집으로 가는 길은 멀구나.”
그는 정주의 산하를 멀리서 바라보며 다시금 눈물을 삼켜야 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에게 분단은 해방보다 더 잔인한 형벌이었다.
함께 탈 수 없었던 남행 열차, 생이별의 고통 문윤국은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고향에 머물며 체제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금 정처 없는 길을 떠날 것인가. 기독교 신앙과 자유 민주주의적 가치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던 그에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비극은 가족과 함께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정주는 이미 공산 세력의 감시망이 촘촘히 뻗어 있었다. 일제의 수배를 받고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가족 전체를 이끌고 이동하는 것은 곧 몰살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이미 고초를 겪은 가족들이 또다시 사지로 내몰리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나 하나가 움직여야 나머지 가족이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절박한 판단이었다. 결국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차마 남하의 기약을 알리지도 못한 채, 어둠을 틈타 홀로 남행 열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독립을 하면 온 가족이 정주 땅에서 함께 농사지으며 예배드리겠다던 소박한 꿈은 분단의 칼날 앞에 무참히 찢겨 나갔다.
분단의 장벽을 넘는 눈물
1940년대 후반, 38선을 넘는 삼엄한 경계 속에 문윤국이 있었다. 그는 정주의 흙을 다시 품에 넣었다. 독립된 조국에 뿌리려 했던 그 흙은 이제 실향민의 한(恨)이 서린 유품이 되어버렸다.
남행 열차 창밖으로 보이는 조국의 산천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나, 남겨두고 온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은 그의 심장을 납덩이처럼 짓눌렀다. 분단이라는 비극의 시작점에서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길,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슬픈 예감을 직면하고 있었다.
– 계속 –
[기자 메모] 문윤국 선생의 월남은 개인의 안위를 위한 도피가 아니었다. 북한 체제 하에서 신앙을 지킬 수 없다는 종교적 양심과,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려는 가장으로서의 고뇌가 빚어낸 눈물의 선택이었다. 이는 훗날 문씨 가문의 자제들이 대거 월남하여 남한 사회의 기둥이 되는 역사의 복선이 되었다.
【企画連載 独立運動家 文潤国 ⑫】日帝よりも胸を締め付ける、分断の悲劇
【ローカル世界=李勝敏 記者】 1945年8月15日、満州平原の地平線に昇った太陽はいつもと変わらなかったが、空気はすでに激しく揺れ動いていた。ラジオから流れる日王の降伏宣言。その短い文章が虚空を切り裂いた瞬間、満州安東県(アンドン県)の古びた家屋に身を潜めていた文潤国は、古びた聖書を床に落とした。26年におよぶ亡命生活、九死に一生を得る修羅場を幾度も潜り抜けた末に迎えた、待望の「光の回復(光復)」であった。
「主よ、ついにこの日を見せてくださるのですか」
文潤国は膝をついた。溢れ出る哭泣(こっきゅう)は、定州の市場に響いたあの日の歓声よりも深く、満州の吹雪よりも激しかった。彼は懐から、大切に保管していた手ぬぐいの包みを取り出した。1921年、鴨緑江を渡る際に握りしめた、故郷・定州の土であった。
「さあ、帰ろう。この土を再び定州の山河に撒き、五山学校の子供たちと共に太極旗を振るのだ」
彼は震える手で土を愛おしそうに撫でながら通哭した。しかし、その感激は長くは続かなかった。解放の報せと共に届いたもう一つの衝撃は、ソ連軍の北朝鮮進駐と、38度線という巨大な障壁の出現であった。
定州へ向かう道、遮られた故郷の空
文潤国はすぐさま故郷・定州へと足を速めた。しかし、鴨緑江を渡って辿り着いた北の地は、彼が夢にまで見た独立国家の姿ではなかった。赤軍の軍靴の音が定州の平和な通りを埋め尽くし、信仰と自由を命のように尊んできた彼にとって、共産主義体制の台頭は、また新たな巨大な抑圧として迫ってきた。
故郷の定州のすぐ近くまで行きながらも、彼はどうしても我が家の敷地に一歩を踏み出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すでに地主や宗教人に対する弾圧が始まっているという噂が聞こえてきたからだ。
「祖国は取り戻したというのに、我が家への道はこれほどまでに遠いのか」
彼は定州の山河を遠くから見つめながら、再び涙を飲み込むしかなかった。独立運動のためにすべてを捧げた彼にとって、分断は解放よりも残酷な刑罰であった。
共に乗れなかった南行列車、生別の苦痛
文潤国は重大な決断を迫られていた。故郷に留まって体制に順応するか、それとも再びあてのない旅に出るか。キリスト教の信仰と自由民主主義的な価値を生命よりも重く見ていた彼に、選択肢は一つしかなかった。
しかし、最大の悲劇は、家族を伴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点にある。当時の定州には、すでに共産勢力の監視網が張り巡らされていた。日帝の手配を受け、名の知られた独立運動家であった彼が、家族全員を引き連れて移動することは、即座に「全滅」を意味した。
何よりも彼は、自分の信念のせいですでに塗炭の苦しみを味わってきた家族たちが、再び死地へと追いやられるのを、どうしても見るに忍びなかった。
「私一人が動いてこそ、残された家族が命を繋ぐことができる」
切迫した判断であった。結局、彼は愛する妻や子供たちに南へ下る約束を告げることすらできぬまま、闇に紛れて一人、南行列車に身を投じるしかなかった。独立したら家族全員で定州の土地を耕し、共に礼拝を捧げようというささやかな夢は、分断の刃によって無残にも引き裂かれた。
分断の障壁を越える涙
1940年代後半、38度線を越える厳重な警戒の中に文潤国がいた。彼は定州の土を再び懐に仕舞い込んだ。独立した祖国に撒こうとしたその土は、今や失郷民の「恨」が染み込んだ遺品となってしまった。
南行列車から見える祖国の山河は眩しいほどに美しかったが、残してきた家族への罪悪感と恋しさは、彼の心臓を鉛のように重く圧迫した。分断という悲劇の起点で、彼は自分が歩むべき道、そして二度と故郷へは戻れないかもしれないという、悲しい予感に直面していた。
(つづく)
【記者メモ】 文潤国先生の越南(ウォルナム、南へ下ること)は、個人の安寧のための逃避では決してなかった。北朝鮮体制下では信仰を守り抜けないという宗教的良心と、家族を危険に晒すまいとする家長としての苦悩がもたらした、涙の選択であった。これは後年、文氏一族の子弟たちが大挙して南へ渡り、韓国社会の根幹を支える柱となっていく歴史の伏線となった。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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