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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교룡산성 군기고터 발굴 조사지역 전경.(남원시 제공) |
[로컬세계 이태술 기자]전북 남원시가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발굴 중인 교룡산성 군기고터가 통일신라 말∼고려 초기에 조성된 대규모 건물지(터)로 확인됐다고 7일 밝혔다.
남원 교룡산성은 문헌에 조선시대 산성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동안 교룡산성 및 그와 관련된 부속건물지 등은 조선시대와 결부시켜왔다. 물론 현재는 교룡산성을 제외한 건물지 등은 오래전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어 정확한 위치조차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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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룡산성 군기터 발굴조사 현지보고회를 가졌다.(오른쪽 이환주 남원시장) |
군기고터는 교룡산성과 관련해 최근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그 위치가 구전되어온 건물지로 지표에서 철제 화살이 수습된 바도 있다. 이에 관련자들은 그동안 이곳을 조선시대 군기고터로 추정했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와는 관련없는 나말여초기의 대규모 건물지로 확인됐다.
건물지는 크게 3차례에 걸쳐서 중창됐으며, 이 가운데 1차 건물지가 가장 잘 남아 있다.
건물지는 전체적으로 대지를 조성한 후 다시 기반토를 조성한 다음 그 위에 축조했다. 건물지의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장축 14.2m, 단축 8.5m, 주간 거리는 2m 내외이며 정면의 축대를 기준으로 동‧서쪽 기단이 명확하게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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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교룡산성 군기고터 발굴(축대 전경) |
축대는 돌과 흙을 이용해 상당한 넓이와 두께로 조성했다. 건물지의 위용을 드러내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기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2차 건물지는 기단장축방향의 북쪽 초석 7개만 남아 있는 상태로 1차 건물지 동‧서 기단을 그대로 사용했고, 북쪽 기단이 남쪽으로 전진하면서 새롭게 조성된 건물지로, 1차 건물지 폐기 후 기와를 두껍게 깔아 기단토를 조성한 후 그 위에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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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교룡산성 군기고터 발굴(축대 근경) |
이때 사용한 기와는 1차 건물지에 사용된 기와로 추정되는데 의도적으로 잘게 부순 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1차건물지의 사용시기와 2차 건물지의 사용시기는 거의 동일한 시기로 판단된다. 3차 건물지는 추정 초석만 일부 확인될 뿐 본래 구조나 규모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
유물은 평기와류가 대부분으로 문양은 무늬가 없는 무문과 선 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선문계 기와, 격자문이 새겨진 격자문계 무늬가 다수를 이룬다. 특히 생선뼈무늬가 표현된 어골문계 기와가 소량 출토됐는데 어골문의 초기형태로 추정돼 그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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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교룡산성 군기고터 발굴(축대 축조 상태) |
이번 발국조사는 남원시가 교룡산성 정비복원을 위한 학술자료 확보를 위해 추진 중인 교룡산성 매장문화재 학술조사사업의 하나로 재단법인 전라문화유산연구원에 의뢰해 진행됐다.
한편 남원 교룡산성은 전북 기념물 제9호로 임진왜란 때에 승병장 처영이 수축해 남원 읍성과 함께 지키고자 했던 곳으로 성안에는 우물이 99개나 있었고, 산새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유사시 인근 주민이 대피하기 좋은 천해의 군사요새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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