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견벽청야 작전과 일흔 노구의 피난길
정선의 밤하늘에 올린 피눈물의 기도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동족상잔의 전쟁은 한반도의 가장 깊은 오지인 강원도 정선(旌善)의 산골짝까지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해방 정국의 권력 투쟁에 환멸을 느끼고 정선의 한적한 화전민 마을로 숨어들었던 문윤국(文潤國) 지사에게, 태백산맥을 타고 밀려든 전쟁의 그림자는 일제의 총칼보다 더 가혹한 형벌이었다.
천혜의 요새가 되어버린 험준한 정선의 산악 지대
강원도 정선은 태백산맥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육백산, 함백산, 가리왕산 등 1,000m가 넘는 험준한 고봉들로 둘러싸인 깊은 산악 지대이다. 전쟁 초기 북한군이 남침할 때와 이후 국군 및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한군 패잔병들이 후퇴할 때, 이 험한 정선의 골짜기들은 몸을 숨기고 유격전을 펼치기에 더없이 좋은 천혜의 요새였다. 해방 공간의 감시를 피해 숨어든 문 지사의 호젓한 피난처였던 정선의 산하는, 순식간에 피비린내 나는 유격전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1950년 9·28 수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전세를 뒤집자, 남한 지역에 고립된 북한군 패잔병들이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때 북한군 제2군단 소속의 패잔병들과 유격대가 정선, 삼척, 영월 일대의 깊은 산골로 숨어들어 조직적인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빨치산의 거물인 이현상이 이끄는 전설적인 '남부군(남조선인민유격대)'의 일부 세력과 지방 공산주의자들이 정선 전역의 화전민 마을을 습격하여 식량을 약탈하고 군경을 기습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낮과 밤이 바뀌는 비극'의 실재와 야만
당시 정선군 일대의 화전민 마을들은 군경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였다. 국군 및 경찰은 주로 정선읍내나 주요 도로망을 중심으로 주둔했기 때문에, 낮에는 국군이 들어와 치안을 유지했지만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산속에 숨어있던 빨치산들이 마을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른바 '낮과 밤이 바뀌는 비극'의 실재였다.
이 과정에서 화전민들은 양쪽 세력 모두에게 협조를 강요받았고, 조금이라도 밀고한 혐의가 있으면 처참하게 보복을 당해야 했다. 문 지사는 정주 오산학교 시절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민족의 화평’과 ‘하나님 중심의 사랑’이 광기 어린 좌파 이념의 장막 아래 무참히 짓밟히는 현실을 목격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독립운동 시절에는 좌와 우를 불문하고 조국 광복을 위해 뭉쳤던 동포들이, 이제는 서로의 심장에 서슴없이 칼을 꽂는 현실 앞에 문 지사는 깊은 애통함에 잠겼다.
“내가 대신 죽으리라”, 마을을 지킨 위엄
마을에 들이닥친 인민군이 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하려 했을 때, 누구도 반항하지 못했고 아무도 그들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그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때 ‘문 영감’이라 불리던 문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낡은 무명옷 차림이었으나, 그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기개는 총을 든 군인들을 압도했다.
“이 아이들은 아무 죄가 없소. 굳이 책임을 물으려거든 이 늙은이를 데려가시오. 내가 이들의 아비요, 스승이오.”
평생을 독립운동으로 단련된 그의 목소리에는 거를 수 없는 권위가 실려 있었다. 지휘관은 이 범상치 않은 노인의 기품에 눌려 결국 발길을 돌렸다. 정선 화전민들에게 문윤국은 단순한 피난민 노인이 아니라, 환란 속에서 자신들을 지켜주는 거대한 바위와 같은 존재였다.
견벽청야(堅壁淸野)의 불길과 필연적인 피난길
1950년 말부터 1951년 초에 걸쳐 국군 제11사단 등을 중심으로 호남 및 강원도 일대의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한 대대적인 '견벽청야(堅壁淸野)' 토벌 작전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군은 빨치산의 보급로와 은신처를 차단하기 위해 깊은 산골의 화전민 가옥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안전지대로 이주시키는 작전을 감행했다. 정선의 하늘은 아군이 지른 불과 적이 지른 불로 밤낮없이 붉게 물들었다.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의 대가가 조국의 완전한 소멸인 듯, 불타오르는 정선의 산하를 바라보며 일흔의 문 지사는 다시 한번 괴나리봇짐을 싸야 했다. 평생의 망명 생활과 모진 투옥으로 일흔의 노구는 이미 성한 곳이 없었으나, 포화와 폭격을 피해, 그리고 삼엄한 사상 검증을 피해 정선의 화전민 마을을 떠나 험난한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지방 군경과 빨치산 양쪽의 살기 가득한 검문검색을 통과해야 했던 험로 위에서, 문 지사는 신분을 숨긴 채 ‘이름 없는 늙은 실향민’으로 묵묵히 그 고난의 터널을 걸어갔다.
정선의 밤하늘에 올린 피눈물의 기도
피난길의 굶주림과 추위보다 문 지사를 더 괴롭힌 것은 북녘 고향 정주(定州)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과 실향의 한(恨)이었다. 전쟁의 포화가 남과 북을 완전히 갈라놓을수록,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지 모른다는 슬픈 예감이 심장을 짓눌렀다. 검은 연기가 자욱한 피난길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문 지사는 소리 죽여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지금 저 무자비한 총탄과 칼날 아래 울부짖고 있는 이 민족의 비극을 통찰해 주소서. 어찌하여 한 피를 나눈 형제들이 서로를 죽이지 못해 이토록 미쳐 날뛴단 말입니까. 이 죄 많은 문윤국을 벌하시고, 저 가련한 강산과 백성들을 구원해 주옵소서.”
그는 이 처절한 비극 속에서도 오히려 동족의 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구도자처럼, 피난길에서 만나는 굶주린 아이들에게 자신의 주먹밥을 건네고 상처 입은 이들을 위해 손을 얹어 기도했다.
기적적으로 사선을 넘어 전쟁이 휴전으로 멈춰 섰을 때, 삼팔선은 더 단단하고 거대한 철책선이 되어 가로막혔다. 고향 정주는 이제 갈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이 되었고, 가족과의 생이별은 지상에서의 영원한 한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전란의 참화와 빨치산의 야만 속에서 문윤국 지사가 온몸으로 받아내고 정화했던 신앙의 정절과 피눈물의 기도는 결코 무의미한 소멸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민족의 비극 속에서 그가 끝까지 지켜낸 고결한 눈물은, 전란의 포화를 뚫고 흥남감옥을 탈출해 내려온 그의 친손자 문선명을 만나 가문의 천명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역사의 복선이 되고 있었다.
– 계속 –
【企画連載:独立運動家 文潤国 ⑭】 太白の高峰に宿る野蛮… 旌善の谷を血で染めた6・25の悲劇
【LOCAL世界=李勝敏記者】 1950年6月25日に勃発した同族相食む戦争は、韓半島における最も深い奥地である江原道旌善の山谷にまで残忍に忍び寄った。解放政局の権力闘争に幻滅を感じ、旌善の閑静な火田民の村へと隠棲していた文潤国志士にとって、太白山脈を伝って押し寄せた戦争の影は、日帝の銃剣よりも過酷な刑罰であった。旌善一帯の地理的特性と当時の歴史的状況を紐解けば、老志士が直面せねばならなかった悲劇が、徹底した歴史的ファクトに基づいていることがわかる。
■千海の要塞と化してしまった険しき旌善の山岳地帯
江原道旌善は、太白山脈の中心部に位置し、六百山、咸白山、加里王山など、1,000メートルを超える険しい高峰に囲まれた深い山岳地帯である。戦争初期に北朝鮮軍が南侵した際、そしてその後の国軍および国連軍の反撃によって北朝鮮軍の敗残兵が後退した際、この険しい旌善の谷々は、身を隠して遊撃戦を展開する上でこれ以上ない絶好の要塞となった。解放空間の監視を避けて逃れてきた文志士の静かな避難所であった旌善の山河は、瞬く間に血生臭い遊撃戦の中心地へと変貌を遂げた。
1950年の「9・28ソウル奪還」によって国軍と国連軍が戦勢を覆すと、南韓地域に孤立した北朝鮮軍の敗残兵たちが太白山脈を伝って北上し始めた。この時、北朝鮮軍第2軍団所属の敗残兵や遊撃隊が旌善、三陟、寧越一帯の深い山奥へと潜り込み、組織的なパルチザン(共産ゲリラ)活動を展開したのである。特に、パルチザンの巨頭である李鉉相が率いる伝説的な「南部軍(南朝鮮人民遊撃隊)」の一部勢力と地方の共産主義者たちが、旌善全域の火田民の村を襲撃しては食糧を略奪し、軍警を奇襲する事件が頻繁に発生した。
■「昼と夜が変わる悲劇」の実態と野蛮
当時、旌善郡一帯の火田民の村々は、軍警の行政力が及ばない死角地帯であった。国軍および警察は主に旌善の町中や主要な道路網を中心に駐留していたため、昼間は国軍が立ち入って治安を維持したが、日が暮れて夜になると、山中に潜んでいたパルチザンが村を完全に掌握した。いわゆる「昼と夜が変わる悲劇」の実態であった。
この過程で火田民たちは、双方の勢力から協力を強要され、少しでも密告した嫌いがあれば、無残な報復を受けねばならなかった。文志士は、定州の五山学校時代に子供たちへ説いた「民族の和平」と「神中心の愛」が、狂気じみた左派理念の帳の下で無残に踏みにじられる現実を目の当たりにし、血の涙を流した。独立運動時代には、左と右を問わず祖国光復のために結束した同胞たちが、今や互いの心臓に容赦なく刃を突き立てる現実を前に、文志士は深い哀痛に沈んだ。
「私が代わりに死のう」、村を守った威厳
村に押し寄せた人民軍が、青年たちを強制的に徴集しようとした時、誰も反抗できず、誰も彼らの前に立ち塞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それは直ちに「死」を意味したからである。
その時、「文爺さん」と呼ばれていた老人が前に進み出た。古びた木綿の衣服をまとっていたが、その眼差しから放たれる凄まじい気概は、銃を手にした兵士たちを圧倒した。
「この子供たちには何の罪もない。どうしても責任を問うというなら、この老いぼれを連れていくがいい。私が彼らの父であり、師である」
生涯を独立運動で鍛え上げられたその声には、抗うことのできない権威が宿っていた。指揮官はこの非凡なる老人の気品に気圧され、ついに引き返していった。旌善の火田民にとって文潤国は、単なる避難民の老人ではなく、患難の中で自分たちを守ってくれる巨大な岩のような存在であった。
■堅壁清野の炎と、必然たる避難路
1950年末から1951年初頭にかけて、国軍第11師団などを中心に、湖南および江原道一帯のパルチザンを掃討するための大規模な「堅壁清野」討伐作戦が展開された。この過程で国軍は、パルチザンの補給路と隠れ家を遮断するため、深い山奥の火田民の家屋を焼き払い、住民を安全地帯へと移住させる作戦をあえて断行した。旌善の空は、味方が放った炎と敵が放った炎で、夜昼問わず赤く染まった。
生涯を捧げた独立運動の代償が、まるで祖国の完全なる消滅であるかのように、燃え盛る旌善の山河を見つめながら、七十の文志士は再び風呂敷包みを背負わねばならなかった。長年の亡命生活と過酷な投獄により、七十の老躯はすでにまともな状態ではなかったが、砲火と爆撃を避け、そして厳峻を極める思想検証を避けて旌善の火田民の村を離れ、険しい避難の途に就くほかはなかった。地方の軍警とパルチザン、双方の殺気立った検問を通過せねばならなかった険路の上で、文志士は身分を隠し、「名もなき老いた失郷民」として黙々とその苦難のトンネルを歩んでいった。
■旌善の夜空に捧げた血の涙の祈り
避難路における飢えと寒さよりも文志士を苦しめたのは、北の故郷・定州に残してきた家族への罪悪感と、失郷の恨であった。戦争の砲火が南と北を完全に引き裂くほど、二度と故郷へは戻れないかもしれないという悲しい予感が、肺腑を鉛のように圧迫した。黒煙の立ち込める避難路の夜空を見つめながら、老志士は声を殺して祈りを捧げた。
「神よ、今、この無慈悲な銃弾と刃の下で泣き叫んでいる、この民族の悲劇を通察し給え。いかで、ひとつの血を分かち合った兄弟たちが、互いを殺めずにはいられぬほど、これほどまでに狂い狂うのでしょうか。この罪深き文潤国を罰し、あの憐れむべき江山と民を救い給え」
彼はこの凄惨たる悲劇の中でも、むしろ同胞の罪を自らの肩に背負った求道者のように、避難路で出会う飢えた子供たちに自分の握り飯を差し出し、傷ついた者たちのために静かに手を置いて祈った。
奇跡的に死線を越え、戦争が休戦によってひとまず止まった時、38度線はさらに強固で巨大な鉄柵となって行く手を阻んだ。故郷・定州は、今や行くことのできない永遠の異郷となり、家族との生別は地上における永遠の恨として刻まれた。
しかし、戦乱の惨禍とパルチザンの野蛮の中で、文潤国志士がその身で受け止め、浄化してきた信仰の貞節と血の涙の祈りは、決して無意味な消滅ではなかった。この巨大な民族の悲劇の中で彼が最期まで守り抜いた高潔なる涙は、戦乱の砲火を潜り抜け、興南監獄を脱出して南へと下ってくることになる実の孫・文鮮明と巡り合い、家門の天命へと繋がっていく偉大なる歴史の伏線となっていたのである。
(つづ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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