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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떡가게에 진열된 오하라메떡.(사진=이승민 도쿄특파원) |
[로컬세계 이승민 특파원]일본 교토에서는 봄과 가을에 오하라메축제(大原女まつり)를 연다. 어렵던 시절 우리에게 보리개떡이 있었다면 교토에는 오하라메떡이 있다. 오하라메’(大原女)는 오하라(大原)마을의 여인(女)을 의미한다. 이 떡은 부드러운 찹쌀떡에 검은콩을 넣어 만든 것으로 한 입 깨물면 보드랍고 순결한 맛이 담백하고 참 맛있다.
이 찹쌀떡에는 오하라 여인들의 애틋한 사연이 어려있다.
교토에서 자동차를 타고 북쪽으로 굽이굽이 50분쯤 가다 보면 사방이 울창한 숲으로 우거진 산촌을 만난다. 나무들로 빽빽한 히에이산(比叡山) 속에 자리를 잡은 오하라(小原)마을이다. 하늘이 손바닥 만하게 보이는 숲마을 아래로 맑고 아름다운 다카노강(高野川)이 흘러간다. 헤이안시대(794-1185), 크고 작은 전쟁 속에서 남자들은 죽고 미망인들은 교토를 탈출하여 이 산속에 숨어 살았다. 오직 숲뿐인 산골인지라 논밭을 개간 할 수 없어 먹고 살기가 막막했다. 여인들은 생계를 위해 나뭇단를 머리에 이고 40리길을 걸어 교토에 나가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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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오하라 여인들의 삶을 재현한 그림. |
아침 일찍 나무를 해서 머리에 이고 교토에 도착하면 점심 때가 된다. 교토의 장터, 니시키시장(錦市場)에 가서 팔아보지만 받는 돈은 겨우 하루 식량을 살 동전 몇 잎이다. 달랑 식량을 사서 머리에 이고 다시 40리길을 걸어서 돌아온다. 석양빛에 숲이 붉게 물들 때쯤 마을에 도착한다. 어린 자식들은 문 밖에 나와 허기진 얼굴로 눈 빠지게 어머니를 기다린다. 그러기에 이 마을 여인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점심마져 건너뛴 채 돌아가는 발걸음은 피곤하기 그지 없다. 너무 배가 고파 도저히 오하라까지 걸어갈 기운이 없다. 교토를 빠져나와 돌아가는 길목에 떡집이 하나 있다. 데마치야나기(出町柳) 거리에 다와라야깃토미 (俵屋吉富)라는 떡집이다. 아낙들은 먹음직스러운 찹썰떡에 침만 삼킨다. 그거라도 한 개 사먹지 않으면 기진맥진해서 도저히 걸어갈 힘이 없다. 눈앞에 자식들의 얼굴이 어른거려 한참을 망설인다. 떡 1상자에 10개가 들어 있어, 하나만 살 수 있냐고 물어 보지만 주인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옷차림은 상거지요 몸에서는 땀 냄새가 진동하여 가까이 오는 것초차 꺼리는 눈치다.
그 후 떡장수는 아낙들이 오하라마을의 나뭇단 장수인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얼마나 힘들게 번 동전 몇 잎인가를 느끼자 문전박대했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고 마음이 아팠다. 그 다음날부터 떡집 주인은 찹쌀떡에 검은콩을 잔뜩 넣어 크게 만들었다.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도록 실하게 만들어 1개씩 싸게 팔았다. 이것이 교토의 명물 '오하라메 찹쌀떡'의 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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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하라메축제 중 두 여인이 똬리를 머리 위에 놓고 나뭇단을 이고 오하라 여인들이 걸었던 길을 체험하고 있다. |
교토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오하라메축제를 벌인다. 그 옛날 오하라의 아낙들처럼 깡총한 옷을 입고 나뭇단을 머리에 이고, 쟈코인(寂光院)에서 쇼린인(勝林院)까지 약 2㎞를 걷는다. 그녀들이 걸었던 길을 조금이라도 걸어보는 시대체험축제다. 참가비 2000엔을 내면 옷, 수건, 나뭇단 등을 빌려준다. 옛날부터 전해오던 이 축제가 코로나19로 인해 아쉽게도 작년과 올해 중지되었다.
우리나라 여인들은 아이를 업고서도 물동이나 물건을 머리에 이어 날랐다. 샛밥을 머리에 이고 논밭으로 걸어다니는 모습은 지금도 흔히 본다. 오하라 여인들은 흰버선에 짚신을 신었고 머리에 똬리를 놓고 물건을 얹었다. 물건을 이고서 매일 왕복 80리길을 억척스럽게 걸어다녔던 오하라 여인들에게 왠지 정이 간다. 한국 여인들의 정취가 사뭇 풍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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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하라메 봄축제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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