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루의 숲과 행정의 중심...서쪽 신주쿠(西新宿)
일본 최대의 상권과 뒷골목의 온기...동쪽 신주쿠(東新宿)
국경 없는 에너지의 용광로...신오쿠보(新大久保)
[로컬세계 = 이승민 도쿄 특파원] 시부야(渋谷)가 젊음의 해방구이자 유행의 용광로였다면, 신주쿠(新宿)는 도쿄라는 유기체의 생존과 욕망이 가장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진짜' 심장부다. 하루 이용객이 약 350만 명에 육박해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된 세계 최대의 터미널을 중심으로, 마천루의 숲과 어두운 뒷골목이 공존하는 이곳은 도쿄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품고 있다.
새로운 숙소(新宿), 역참 마을에서 세계 최대의 부도심으로
신주쿠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새로운(新) 숙소(宿)’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그 시작은 1698년, 에도와 지방을 잇는 주요 간선 도로인 고슈 가도(甲州街道)의 첫 번째 관문으로 개설된 나이토 신주쿠(内藤新宿)였다. 당시 신슈 다카토번의 영주였던 나이토(内藤) 가문의 저택 일부를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로 내어주며 번성했던 이곳은, 1885년 철도가 부설되면서 운명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철도 부설 당시 소음과 매연을 우려한 주민들의 반대로 정작 역은 마을 외곽인 현재의 위치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당시만 해도 논밭이 전부였던 한적한 변두리 기차역이 오늘날 하루 약 350만 명이 오가는 세계 철도의 정점이 된 것은 실로 드라마틱한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말들이 쉬어가고 여행자들이 여독을 풀던 이 한적한 외곽 지대를 도쿄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결정적 계기는 1923년 간토 대지진(関東大震災)이었다. 지반이 약한 시타마치(下町) 지역이 지진으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것과 달리, 단단한 암반 지대 위에 자리 잡은 신주쿠는 피해가 경미했다. 이후 안전한 주거지를 찾아 이주해온 사람들이 신주쿠역을 중심으로 거대한 상권을 형성했고, 1991년 도쿄도청(東京都庁)까지 이곳으로 이전해 오며 신주쿠는 명실상부한 도쿄 제1의 도심으로 우뚝 섰다.
세계 1위 터미널의 위엄: 하루 350만 명의 발길이 만드는 거대한 혈류
신주쿠 산책의 물리적, 심리적 중심은 단연 신주쿠역(新宿駅)이다. JR을 필두로 게이오(京王), 오다큐(小田急), 도쿄메트로 등 수많은 철도 노선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이곳의 하루 이용객은 약 350만 명에 달한다. 이는 일본의 대도시인 요코하마시(横浜市) 전체 인구가 매일 한 장소에 모였다 흩어지는 것과 맞먹는 수치다.
1분 1초를 다투며 바삐 움직이는 인파의 흐름은 마치 거대한 유기체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혈류'와 같다. 도쿄의 또 다른 핵심 축인 시부야역(약 330만 명)과 이케부쿠로역(약 260만 명)의 기록마저 압도하며 세계 철도역 순위의 정점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신주쿠역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거대 도시이자 도쿄라는 메트로폴리스를 움직이는 거부할 수 없는 역동성의 근원이다. 이 거대한 미로 속에서 산책자는 길을 잃는 대신,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가장 치열한 삶의 박동을 목격하게 된다.
마천루의 숲과 행정의 중심: 서쪽 신주쿠(西新宿)
신주쿠역 서구(西口)는 1965년 요도바시 정수장(淀橋浄水場) 이전 부지에 들어선 마천루들이 장관을 이룬다. 1991년 이전해 온 도쿄도청사(東京都庁舎)를 비롯해 고층 빌딩이 밀집한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사무 공간이 밀집된 비즈니스 지구다. 차가운 유리와 콘크리트 사이를 걷는 정장 차림의 인파 속에선 대도시 특유의 고독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도심 속 오아시스인 신주쿠 중앙공원과 인근의 고층 빌딩군은 현대 일본의 성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최대의 상권과 뒷골목의 온기: 동쪽 신주쿠(東新宿)
철길 너머 동구(東口)는 서쪽의 정제된 마천루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산책자를 맞이한다. 이곳은 일본 최고의 매출을 자랑하는 이세탄(伊勢丹) 백화점을 필두로 한 쇼핑의 메카인 동시에, 밤낮없이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아시아 최대의 환락가임을 증명하는 가부키초(歌舞伎町)의 본거지다.
그러나 신주쿠의 진짜 매력은 이 화려함의 뒤편, 좁고 낮은 골목길에 숨어 있다. 전후 암시장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오모이데 요코초(思い出横丁)와 낡은 목조 건물에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200여 개의 작은 술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신주쿠 골든 가이(新宿ゴールデン街)가 바로 그곳이다. 성인 두 명이 지나가기에도 버거운 비좁은 카운터에 앉아 낯선 이와 어깨를 맞대고 나누는 술 한 잔은, 거대 도시 신주쿠가 숨겨둔 의외의 따스함이자 지친 도시인들에게 건네는 투박한 위로와도 같다.
더불어 인근의 신주쿠 2초메(新宿二丁目)는 일본 최대 규모의 성소수자 거리로서, 도쿄라는 거대 메트로폴리스가 지닌 다양성의 품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동쪽 신주쿠는 자본의 최정점과 삶의 가장 밑바닥 감성이 공존하며, 도쿄라는 도시의 다층적인 켜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국경 없는 에너지의 용광로...신오쿠보(新大久保)
가부키초의 끝자락을 따라 걷다 보면 공기의 냄새가 바뀐다. 일본 최대의 한국인촌, 신오쿠보(新大久保)다. 과거 재일동포들의 고단한 삶이 뿌리 내렸던 이곳은 이제 'K-컬처'의 발신지로서 한일 문화 교류의 최전방이 되었다. 한때 소외된 이들의 거주지였던 공간이 도쿄에서 가장 활기찬 명소로 거듭난 모습은 도시의 역동성을 증명하는 또 다른 사례다.
도심 속의 오아시스...신주쿠 교엔(新宿御苑)과 멈추지 않는 도시의 박동
빌딩 숲의 소란함에서 단 약 10분만 걸어 들어가면, 거짓말처럼 고요한 숲이 나타난다. 신주쿠 교엔(新宿御苑)은 이 거대 도시가 허락한 가장 완벽한 쉼표다. 과거 나이토(内藤) 가문의 저택 부지에서 시작해 황실 정원을 거쳐 국민 공원이 된 이곳은 프랑스식 정형 정원, 영국식 풍경 정원, 그리고 전통 일본식 정원이 경계 없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현대적인 마천루를 배경으로 잔디밭에 누워 있으면, 신주쿠의 혼란스러움조차 하나의 우아한 풍경으로 치환되는 경이로운 여유를 경험하게 된다.
미래를 향한 변신... '신주쿠 그랜드 터미널'
현재 신주쿠는 멈춰있지 않다. 복잡한 역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2040년 완공을 목표로 '신주쿠 그랜드 터미널'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서구의 오다큐 백화점 부지에 260m 높이의 초고층 트윈 타워가 들어서고 철길 상공을 잇는 보행 데크가 설치되면, 신주쿠는 동서의 단절을 극복하고 다시 한번 도쿄의 미래를 정의할 것이다.
신주쿠는 결코 한 문장으로 정의될 수 없는 도시다. 누군가에게는 성공을 꿈꾸는 기회의 땅이고, 누군가에게는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미로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고단한 하루를 달래주는 단골 술집의 조명이다. 하루 약 350만 명의 욕망과 고독이 튼튼한 지반 위에서 교차하기에, 신주쿠는 오늘도 멈추지 않고 뜨겁게 박동하고 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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