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고양시의 시청사 백석 이전 사업이 법의 벽 앞에서 제동이 걸렸다. 2025년 9월 16일, 의정부지방법원 제1행정부(사건번호 2023구합1489)는 이동환 고양시장이 타당성 조사 용역비를 예비비로 지출한 것과 관련해 일부 위법성을 인정했다. 특히 시의회의 ‘변상 요구’를 묵살한 행위에 대해선 “명백한 위법”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 판결이 단지 행정 절차상의 실수에 그쳤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상황을 지나치게 축소해 보는 것이다. 이번 판결은 지방자치와 예산 집행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에 대해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행정의 독주를 멈춘 건 시민과 법원이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양시는 기존 덕양구청사를 떠나 백석동 업무빌딩으로 시청사를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하며 타당성 조사를 시행했고, 그 비용 약 7,500만 원을 의회의 승인 없이 예비비로 지출했다.
문제는 그 이후다. 시의회는 이를 절차상 위법 소지가 있다며 ‘변상 요구’를 포함한 시정 조치를 요구했지만, 시장은 이를 사실상 묵살했다. 결국 시민들은 주민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2025년 9월 16일 선고에서 “시의회의 시정 요구를 이행하지 않은 것은 지방자치법 위반”이라고 판단했다(의정부지방법원 제1행정부, 사건번호 2023구합1489).
법원은 판결에서 예비비 지출 자체에 대해서도 의회와의 사전 협의 부재, 경기도 감사 이후의 지출 집행, 부시장의 단독 기안 등의 문제를 언급하며 ‘부당한 사항’이라 명시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오류가 아닌, 제도적 견제와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한 행정이라는 사법적 판단이다.
‘만능통장’처럼 쓰인 예비비…제도의 취지를 왜곡하지 말라
예비비는 이름 그대로 예외적인 상황을 대비한 비상 예산이다. 감염병 확산, 긴급 재난 복구, 갑작스런 시설 붕괴 등 사전에 예측하기 어려운 일에 쓰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기에 엄격한 제한이 따르고, 의회의 사전 동의나 사후 보고 등 절차적 통제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고양시의 이번 예비비 집행은 어디까지나 정책적 판단에 따라 계획된 행정사업이었다. 용역 발주, 계약, 비용 지출 등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계획을 “예비적 상황”이라고 포장해버린 셈이다. 이것은 예비비 제도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게다가 시민의 대표기관인 시의회가 시정요구를 했음에도 이를 묵살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단순히 ‘행정기술적 위법’이 아니라, 민주적 통제 메커니즘의 훼손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이제 시장이 응답할 차례다
이동환 시장은 이번 판결에 대해 어떤 정치적·행정적 책임을 질 것인가. 예산의 법적 정당성, 의회의 견제권, 시민의 행정 감시 권한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지방자치의 핵심 기둥이다.
시장은 이제라도 시민 앞에 사과하고, 법원의 판결을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 백석 이전 사업은 절차적 위법성을 지적받은 이상, 전면 재검토가 불가피하다. 또한 시의회의 ‘변상 요구’에 대해서도 명확한 이행 방침을 밝혀야 한다.
시민이 지킨 법치의 선, 흔들려선 안 된다
이번 판결은 단지 고양시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지방자치단체에 “예비비는 만능통장이 아니다”, “시민과 의회의 통제는 무시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메시지를 법원에 앞서 시민들이 먼저 외쳤다는 사실은 한국 지방민주주의의 희망이기도 하다.
지방정부는 행정의 유연함을 말하기 전에, 절차적 정당성과 민주적 책임성이라는 기본 원칙부터 되새겨야 한다. 그것이 무너질 때, 우리는 다시 ‘주민소송’이라는 가장 아픈 방식으로 교정을 요구받게 된다.
로컬세계 / 임종환 기자 lim46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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