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66개 국제기구와 협약에서 대거 탈퇴한 것은 단순한 외교 노선 조정이 아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구축해 온 다자주의 국제 질서에서 스스로 한 발 물러서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이 선택은 국제사회 전반에 충격을 주고 있으며, 다자 협력에 기반해 외교와 경제 전략을 설계해 온 한국에도 중대한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국제기구는 단순한 토론장이 아니라 규범과 신뢰, 예측 가능성을 유지하는 안전판 역할을 해 왔다. 미국이 기후 변화, 인권, 개발 협력, 재생에너지 등 핵심 분야의 기구들에서 일제히 이탈하면서 그 안전판은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 힘의 논리가 규칙을 대체하는 환경으로 국제 질서가 이동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에서 우려는 더욱 크다.
가장 먼저 드러나는 문제는 한국의 외교 자산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인천 송도에 본부를 둔 녹색기후기금(GCF)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쌓아온 상징적 성과다. 그러나 핵심 공여국이던 미국의 탈퇴는 기구의 재정과 위상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이는 단지 하나의 국제기구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추구해 온 기후 금융 허브 전략 전반에 대한 도전이다.
산업과 통상 분야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국제재생에너지기구와 각종 기후·탄소 관련 협약에서 미국이 빠지면서 국제 환경 규범의 일관성은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탄소 중립과 RE100을 기준으로 글로벌 시장에 대응해 온 한국 기업들은 국제 기준과 미국 독자 기준 사이에서 이중 부담을 떠안을 수 있다. 규범이 약화될수록 중견국과 수출국은 오히려 더 큰 위험에 노출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다자주의의 약화가 초래할 구조적 변화다. 미국이 빠진 국제기구의 공백을 중국이 채우려는 움직임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규범과 표준을 둘러싼 미·중 경쟁이 격화될수록, 한국은 다자 틀 안에서 중재자이자 협력자로 활동할 공간을 잃고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나 유엔 체제의 보호막이 약해질 경우, 관세나 안보 비용 같은 민감한 사안에서 한국은 강대국과의 양자 압박을 직접 감당해야 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냉정한 현실 인식과 전략적 대응이다.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변함없지만, 외교와 경제의 모든 축을 단일 국가에 의존하는 구조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유럽연합, 아세안, 일본,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국제기구 내에서의 역할과 기여를 주도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다자주의의 후퇴 국면에서 오히려 규범과 협력의 가치를 지키는 국가로서의 위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제기구 대거 탈퇴는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국제 질서 이동의 신호탄이다. 다자주의를 외교 자산으로 축적해 온 한국은 지금, 수동적 적응이 아니라 능동적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이 변화의 파도를 위기로만 볼 것인지, 새로운 외교 전략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을 것인지에 따라 한국의 미래 외교 지형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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