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산책 ⑱] 다마, 구릉 위에 꽃피운 신도시의 꿈과 천년의 유산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5-18 07:07:22
산리오 퓨로랜드와 세이세키사쿠라가오카
웅장한 신도시 이면에 흐르는 한반도의 숨결
3만 년 전 조몬인이 사랑했던 구릉지
[로컬세계 = 이승민 도쿄 특파원] 지유가오카(自由が丘)의 아기자기한 골목을 뒤로하고 이번 산책이 닿은 곳은 도쿄도 다마시(多摩市)다. 1971년 시로 승격된 다마시는 도쿄의 대표적인 베드타운이자, 일본 최대 규모의 계획도시인 '다마 뉴타운'의 핵심 지역이다. 다마강(多摩川) 중류 우안과 다마 구릉(多摩丘陵) 북단에 걸쳐 있어 기복이 풍부한 지형을 자랑하며, 서구식 도시 계획과 고대의 역사가 묘하게 공존하는 독특한 매력을 품고 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첨단 도시 기능이 조화를 이루는 다마의 매력을 따라 걸어본다.
무사시노 구릉지에 그려진 뉴타운의 꿈
다마센터역(多摩センター駅)을 나서면 도심의 복잡한 풍경 대신, 구릉지의 자연 지형을 고스란히 살려 넓고 시원하게 뻗은 보행자 전용 도로(페데스트리언 데크)가 산책자를 맞이한다. 이 도시는 계획 단계에서부터 차량과 보행자의 동선을 완벽하게 분리하는 '보차분리(歩車分離)' 시스템을 도입했다. 아이들이나 노약자도 차도와 마주칠 걱정 없이 역에서부터 상업 시설, 공원, 학교, 주거지까지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도록 설계된, 그야말로 인간 중심의 미래형 전원도시다.
산리오 퓨로랜드와 세이세키사쿠라가오카
다마시는 도시 계획상 서로 다른 매력을 가진 두 개의 강력한 거점을 두고 발전해 왔다.
산리오 퓨로랜드(サンリオピューロランド): 다마시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명소로, 헬로키티와 마이멜로디 등 세계적인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는 실내형 테마파크다. 역에서 퓨로랜드까지 이어지는 '파르테논 다마 거리'는 유럽의 광장처럼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으며, 거리 곳곳의 안내판과 보도블록에서도 귀여운 캐릭터들을 발견할 수 있어 도쿄 시민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동심과 환상을 선사한다.
세이세키사쿠라가오카역(聖蹟桜ヶ丘駅) 주변: 다마시의 또 다른 상업 중심지로,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케이오(京王) 전철 및 케이오 그룹사들의 본사가 모여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スタジオジブリ)의 명작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耳をすませば)'의 배경 모델이 된 곳으로도 유명하며, 역 발차 멜로디로 주제가인 '컨트리 로드(カントリー・ロード)'가 흘러나와 산책자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문화·휴식 공간
파르테논 다마 거리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웅장한 신전 모양의 문화 시설 '파르테논 다마(多摩市立複合文化施設)'가 모습을 드러낸다. 대형 콘서트홀과 박물관을 갖춘 이곳을 지나 거대한 계단을 오르면, 넓은 호수와 울창한 잔디밭이 펼쳐지는 '다마 중앙공원(多摩中央公園)'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구릉지의 완만한 경사를 따라 조성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으면 깊은 고요와 평화로움이 찾아온다.
이처럼 평화로운 다마 뉴타운은 1971년 스와·나가야마 지구(諏訪・永山地区)의 첫 입주로 시작되어 세계 각국 신도시들의 모태가 되었다. 1982년 '마이타운 구상(マイタウン構想)'을 계기로 업무·상업·문화 기능이 대거 확충되며 이상적인 전원도시로 재탄생했고, 시가지의 30%가 공원과 녹지로 채워진 덕분에 동양경제신보사의 '살기 좋은 도시 랭킹 2015'에서 도내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웅장한 신도시 이면에 흐르는 한반도의 숨결
사실 다마의 푸른 구릉 지대는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터전을 잡고 무사시노(武蔵野)의 전원문화를 일구었던 유서 깊은 땅이기도 하다. 삼국 시대와 나라(奈良) 시대 전후, 한반도 유민들은 관동(関東) 지역 일대로 대거 이주하여 척박한 구릉을 논으로 개간하고 첨단 철기 및 토기 제작 기술을 전파했다. 유유히 흐르는 다마강과 그 지류인 곱다강(乞田川) 유역은 고대 도래인들이 고향의 선진 문화를 꽃피우며 숨 쉬던 삶의 터전이었으며, 이들이 전한 장인 정신과 풍요로운 농경의 기억은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 다마시가 자랑하는 고유한 문화적 자양분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3만 년 전 조몬인이 사랑했던 구릉지
최첨단 계획도시라는 이미지와 달리, 다마시는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유적이 대거 발굴된 역사적 터전이다. 다마 구릉에는 약 3만 년 전인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했으며, 1960년대 뉴타운 개발을 위한 대규모 발굴 조사 당시 수많은 조몬 시대(縄文時代)의 주거지와 토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도쿄도 매장문화재 센터(東京都埋蔵文化財センター)'에 조성된 복원 유적 정원에서는 당시의 수혈식(竪穴式) 주거지 3동과 수십 종의 식물이 재현되어 있어, 수천 년 전 고대인들이 바라보았을 무사시노 구릉의 옛 풍경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다. 아울러 인근 모구사(百草) 지역에는 동일본 최초로 발굴된 매우 희귀한 국왕·천황릉급 무덤인 7세기 초의 '이나리조카 고분(稲荷塚古墳)'이 남아 있어 고대 관동 지역의 역사적 신비로움을 더한다.
다마시는 고대 조몬인의 터전 위에 현대의 도시 공학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매력적인 공간이며, 미래의 동심이 구릉지의 푸른 녹음 속에서 조화롭게 숨 쉬는 도시다. 빌딩 숲 대신 푸른 하늘과 넓은 보행자 거리가 주는 개방감을 만끽하며 걷다 보면,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배려와 함께 도시가 나아가야 할 가장 이상적인 정주 환경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멀리 다마 구릉 너머로 노을이 내려앉는 풍경을 뒤로하고, 도쿄 산책의 발길은 이제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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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메모]
지형적 특징: 다마시는 다마강의 지류인 오구리강(大栗川)과 곱다강(乞田川)이 오랜 세월 깎아 만든 완만한 골짜기, 즉 야토(谷戸) 지형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이 때문에 신도시 내부에서도 평탄한 대지와 구릉지의 다채로운 고저 차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재정적 자립: 다마시는 풍부한 상업 시설과 기업 유치 덕분에 인구 대비 상업 편의성을 뜻하는 '편리도'와 재정 건전성을 뜻하는 '부유도'에서 전국 상위권에 속한다. 일본 정부로부터 보통교부세를 받지 않는 불교부단체(不交付団体) 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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