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지장보살 곁에서 자란 소녀…교토 가미코마의 역사와 여름 축제의 추억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10-22 21:00:33

아내의 절친한 친구 오카다 미요코 씨가 들려준 고향 이야기
고구려계 도래인의 흔적부터 손과 손으로 이어지던 염주의 온기까지
센쿄지(泉橋寺)의 석조 지장보살좌상이다. 높이가 약 4.58m에 이르는 일본 제일의 석조 지장보살이다. 사진 = 오카다 씨 .

[로컬세계 = 이승민 도쿄특파원]  평화로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때때로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최근 아내의 절친한 친구인 오카다 미요코(岡田美代子) 씨를 집으로 초대해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젊은 시절까지 살았던 고향, 교토부 기즈가와시 야마시로초의 가미코마(上狛)로 향했다.

오카다 씨의 추억을 들으며 고향의 역사를 살펴보니, 그곳은 고대 한반도와의 교류부터 중세의 전쟁과 자치, 근대의 차 무역까지 여러 시대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땅이었다.

커다란 지장보살 곁에 펼쳐진 아이들의 놀이터

오카다 씨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마을을 지키듯 자리한 커다란 지장보살과 그 곁에서 친구들과 뛰놀던 어린 시절의 풍경이다.

그 불상은 센쿄지(泉橋寺)의 석조 지장보살좌상이다. 높이가 약 4.58m에 이르는 가마쿠라 시대의 작품으로, 기즈가와시는 이를 ‘일본 제일의 석조 지장보살’로 소개한다. 어린 오카다 씨에게 그 지장보살 곁은 친구들과 마음껏 뛰놀던 친숙한 장소였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해마다 7월 23일 열리던 여름 축제였다. 축제 때면 마을 사람들은 지장보살을 중심에 두고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수십 개의 염주알이 이어진 커다란 염주를 손에서 손으로 돌리다가, 유난히 큰 염주알이 자기 앞에 돌아오면 이마에 대고 소원을 빈 뒤 옆 사람에게 넘겼다.

오카다 씨는 지장보살을 둘러앉아 이웃들과 함께 염주를 돌리던 광경이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다고 회상했다.

아이들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봉지를 들고 집집마다 찾아가면 어른들이 과자를 하나씩 넣어 주었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봉지는 어느새 과자로 가득 찼다.

친구들과 걸었던 골목, 집집마다 건네받은 과자, 지장보살을 둘러앉은 이웃들의 모습. 오카다 씨의 기억에는 축제를 통해 아이와 어른이 함께 어울리던 고향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인연이 깃든 땅

가미코마는 기즈강의 물길과 나라로 이어지는 육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교토와 나라, 오사카 방면을 잇는 교통망 속에서 사람과 물자가 오갔고, 근대에는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차 도매상들이 모여들었다.

이 땅의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한반도와의 인연을 만나게 된다.

가미코마에 남아 있는 고마데라 절터(高麗寺跡)는 7세기 초에 창건된 사찰 유적으로, 고구려에서 건너온 고마씨〔狛氏·高麗氏〕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高麗’는 후대 왕건이 세운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와 관련된 명칭이다.

『일본서기』에는 570년 풍랑을 겪고 일본에 도착한 고구려 사절들을 위해 사가라군에 객관을 마련하도록 하고, 사가라관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객관의 정확한 위치를 오늘날 가미코마의 특정 장소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일대가 고대부터 한반도와 교류하던 지역이었음을 보여 준다.

센쿄지에도 도래인의 역사와 연결되는 배경이 있다. 이 절은 740년 승려 행기(行基)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에서 태어나 활동한 행기는 백제계 도래 씨족인 고시씨(高志氏)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기즈강을 건너는 이 길목에서는 홍수로 다리가 떠내려가면 여행자와 병든 사람들이 나루 근처에 발이 묶이곤 했다. 지역 관광협회는 센쿄지가 이러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세워졌을 것으로 설명한다. 신앙이 사람들의 생활과 맞닿아 있던 공간이었던 셈이다.

지장보살에 얽힌 설화에도 강의 은혜와 두려움을 함께 안고 살아가던 옛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목재를 운반하다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행기가 지장보살을 모셨다는 이야기다. 지장보살은 강을 지켜볼 수 있도록 크게 만들어 달라고 했으며, 전각 안에 들어가기보다 바깥에서 강을 바라보기를 원했다고 전한다.

다만 이는 지역 설화로, 현존하는 석불이 가마쿠라 시대 작품이라는 사실과는 구분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주민들이 지장보살에게 어떤 바람을 품고 의지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전쟁의 상처와 자치의 역사, 세계로 이어진 차 무역

가미코마의 역사에는 주민들의 고된 노동과 전쟁의 아픔도 새겨져 있다.

중세에는 이 일대에 고마노쇼(狛野荘)라는 장원이 있었고, 도다이지 등 나라의 큰 사찰들이 시대에 따라 토지와 수입에 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쌀과 보리, 차와 참깨 등을 납부한 기록은 나라의 종교문화를 뒷받침했던 지역 주민들의 노동을 보여 준다.

1483년에는 가미코마의 고마성이 공격받아 함락됐다. 마을을 둘러싸던 해자의 상당 부분은 지금도 용수로 형태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오늘날 익숙한 마을 풍경에도 전쟁에 대비하고 삶의 터전을 지키려 했던 시대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다.

1485년에는 남부 야마시로에서 지역 영주와 지주 무사들이 결속하고 농민들도 합류해, 대립하던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다. 오랜 전쟁과 군량 징발, 노동 동원에 시달리던 지역사회가 자치로 나아간 ‘야마시로국 잇키’였다. 가미코마를 근거지로 한 중세 고마씨도 이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만 이 가문과 고대 고구려계 고마씨의 혈통적 연속성은 별도로 검증해야 한다.

근대에 이르러 가미코마는 차 무역의 거점으로 발전했다. 주변 산지에서 모인 차는 이곳에서 가공·거래된 뒤 기즈강과 요도강을 따라 고베로 운반됐고, 해외로 수출됐다. 지금도 남아 있는 차 도매상 거리는 마을이 세계 시장과 연결됐던 역사를 전한다.

기억과 기록이 만나는 길을 찾아서

오카다 씨에게 가미코마는 커다란 지장보살 곁에서 친구들과 뛰놀고, 이웃들의 손길 속에서 여름 축제를 즐겼던 따뜻한 고향이었다. 오래된 문헌이 전하는 역사 위에, 그곳에서 자란 한 사람의 소중한 기억이 포개져 있다.

기회가 된다면 오카다 씨와 함께 고향 가미코마를 찾아가 보고 싶다. 고마데라 절터와 센쿄지, 기즈강, 해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길과 오래된 차 도매상 거리를 걸으며, 기록 속 역사와 주민들의 기억을 함께 취재하고 싶다.

지장보살 앞에 다시 선 오카다 씨는 어느 친구를 떠올리고, 어느 골목을 가리킬까. 아이들의 봉지를 과자로 채워 주었던 이웃들의 이야기도 다시 듣고 싶다. 그 기억 하나하나가 가미코마의 역사에 사람의 얼굴과 생활의 온기를 더해 줄 것이다.

大きなお地蔵さまのそばで育った少女――京都・上狛の歴史と夏祭りの思い出

妻の親友・岡田美代子さんが語る故郷の物語
高句麗系渡来氏族の足跡から、手から手へ数珠をつなぐぬくもりまで

[LOCAL世界 = 李勝敏 記者] 穏やかな夕食の席で交わす話は、時として時空を超えていく。先日、妻の親友である岡田美代子さんを自宅に招き、一緒に夕食を囲んだ。話題は自然と、彼女が生まれ、幼い頃から若い頃まで暮らした故郷、京都府木津川市山城町の上狛へと向かった。

岡田さんの思い出に耳を傾けながら故郷の歴史をたどると、そこには古代の韓半島との交流、中世の戦乱と自治、近代の茶の交易まで、幾重もの時代の足跡が重なっていた。

大きなお地蔵さまのそばは、子どもたちの遊び場だった

岡田さんの記憶に鮮やかに残っているのは、村を見守るように鎮座する大きなお地蔵さまと、そのそばで友達と遊んだ幼い日の風景である。

その仏像は、泉橋寺(せんきょうじ)の石造地蔵菩薩坐像だ。高さは約4.58メートル。鎌倉時代の作で、木津川市は「日本一の石地蔵」と紹介している。幼い岡田さんにとって、お地蔵さまのそばは、友達と心ゆくまで遊べる身近な場所だった。

とりわけ心に残っているのは、毎年7月23日に開かれていた夏祭りである。祭りの日には、お地蔵さまを中心に、村の人たちがぐるりと輪になって座った。数十もの珠が連なる大きな数珠を手から手へと回し、ひときわ大きな珠が自分の前に来ると、額に当てて願い事をしてから隣の人へ渡した。

岡田さんは、お地蔵さまを囲んで近所の人たちと数珠を回した光景が、最も印象深く残っていると振り返った。

子どもたちには、もう一つの楽しみが待っていた。袋を持って家々を訪ねると、大人たちがお菓子を一つずつ入れてくれた。村を一周する頃には、袋はいつの間にかお菓子でいっぱいになっていた。

友達と歩いた路地、家々で受け取ったお菓子、お地蔵さまを囲んで座った近所の人たち。岡田さんの記憶には、祭りを通して子どもと大人がともに過ごした故郷のぬくもりが残っていた。

高句麗と百済との縁が息づく土地

上狛は、木津川の水運と奈良へ通じる陸路が交わる交通の要衝だった。京都、奈良、大阪方面を結ぶ交通網の中で人と物が行き交い、近代には、その地の利を生かして茶問屋が集まった。

この土地の歴史をさらにさかのぼると、古代の韓半島との縁に出会う。

上狛に残る高麗寺跡(こまでらあと)は、7世紀初頭に創建された寺院の遺跡で、高句麗から渡来した狛氏〔高麗氏〕に関係する寺院と考えられている。ここでいう「高麗」は、古代の高句麗に関わる名称である。

『日本書紀』には、570年、風浪に苦しんで日本に到着した高句麗の使節のために相楽郡に客館を整えさせ、相楽館で宴を催したという記録が残る。客館の正確な場所を現在の上狛の特定地点に結び付けることはできないが、この一帯が古代から韓半島との交流の舞台だったことを示している。

泉橋寺にも、渡来系の人々の歴史につながる背景がある。同寺は740年、僧・行基によって開かれたと伝えられる。日本で生まれ、活動した行基は、百済系渡来氏族の高志氏の出身とされている。

木津川を渡るこの地では、洪水で橋が流されると、旅人や病人が渡し場の近くで足止めされることがあった。地元の観光協会は、泉橋寺がそうした人々を救済するために建てられたのではないかと説明している。信仰が人々の暮らしと結び付いた場所だったのである。

お地蔵さまにまつわる昔話にも、川の恵みと怖さをともに受け止めて生きた人々の思いが込められている。木材を運ぶ途中で急流にのまれ、命を落とした人々を供養するため、行基がお地蔵さまをまつったという話だ。お地蔵さまは、川を見守れるように大きく造ってほしいと願い、お堂の中に入るよりも、外で川を眺めることを望んだと伝わる。

ただし、これは地域に伝わる昔話であり、現存する石仏が鎌倉時代の作であることとは区別する必要がある。それでも、この物語からは、住民たちがどのような願いを抱いてお地蔵さまを頼りにしてきたのかがうかがえる。

戦乱の傷跡と自治の歴史、世界へつながった茶の交易

上狛の歴史には、人々の厳しい労働や戦争の苦しみも刻まれている。

中世、この一帯には狛野荘(こまのしょう)という荘園があり、東大寺など奈良の大寺院が、時代に応じて土地や収益に関わる権利を持っていた。米や麦、茶、胡麻などの納入記録は、奈良の宗教文化を支えた地域の人々の働きを物語る。

1483年には、上狛の狛城が攻め落とされた。集落を囲んでいた環濠の多くは、現在も用水路として痕跡を残している。今日の見慣れた村の風景にも、戦乱に備え、暮らしの場を守ろうとした時代の記憶が残されているのである。

1485年には、南山城で国人や地侍が結束し、農民も加わって、対立する軍勢の撤退を求めた。長引く戦争や兵糧の徴発、労働への動員に苦しんだ地域社会が自治へと踏み出した「山城国一揆」である。上狛を拠点とした中世の狛氏も、この動きの中で重要な役割を果たした。ただし、この一族と古代の高句麗系氏族との血統的な連続性については、別途検証が必要である。

近代になると、上狛は茶の交易拠点として発展した。周辺の産地から集まった茶は、この地で加工・取引された後、木津川と淀川を通って神戸へ運ばれ、海外へ輸出された。今も残る茶問屋の町並みは、村が世界の市場とつながっていた歴史を伝えている。

記憶と記録が出会う道を訪ねて

岡田さんにとって上狛は、大きなお地蔵さまのそばで友達と遊び、近所の人々に見守られながら夏祭りを楽しんだ、温かな故郷だった。古い文献が伝える歴史の上に、そこで育った一人の大切な記憶が重なっている。

機会があれば、岡田さんとともに故郷・上狛を訪ねてみたい。高麗寺跡と泉橋寺、木津川、環濠の痕跡が残る道、そして昔ながらの茶問屋の町並みを歩きながら、記録に残る歴史と住民たちの記憶を、ともに取材したいと思う。

再びお地蔵さまの前に立った岡田さんは、どの友達を思い出し、どの路地を指さすだろうか。子どもたちの袋をお菓子で満たしてくれた近所の人々の話も、もう一度聞いてみたい。その記憶の一つ一つが、上狛の歴史に人の顔と暮らしのぬくもりを添えてくれるだろう。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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