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정 칼럼] 공기, 그 생동하는 공간의 서사시

이태술 기자

sunrise1212@hanmail.net | 2026-03-13 17:31:25

이훈정 서양화가

나의 작업에서 공기원근법은 단순히 거리를 표현하는 기법을 넘어, 대기의 요동과 그 안에 깃든 생명의 에너지를 포착하는 수행의 과정이다. 화면은 눈앞의 풍경을 재현하는 차원을 지나, 공기의 흐름을 타고 단계적으로 확장되는 사유의 공간이 된다.

전경의 나무와 풀잎은 선명하고 짙은 색조로 묘사되어 촉각적인 실재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시선이 중경으로 옮겨갈수록 색채의 대비는 완화되고 윤곽은 부드러운 유영을 시작한다. 마침내 원경에 이르러 푸른 기운과 엷은 안개가 스며들 듯 겹쳐지며 사물의 경계가 흐릿해지는데, 이는 대기 속 빛의 산란을 반영하는 동시에 관람객의 마음속에 심리적 거리감을 형성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다.

이러한 섬세한 운용은 시각적 깊이를 넘어 정서적 깊이로 이어진다. 관람자는 숲길의 입구에서 시작해 아득해지는 공간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감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보는 행위’는 자연스레 ‘머무르고 사유하는 시간’으로 치환되며, 숲이 지닌 고요한 생명력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화면 속 빛의 농도와 색의 온도는 나의 내밀한 감정을 전달하는 은유다. 따뜻한 빛이 스며든 자리에는 약동하는 희망의 기운을 담았고, 차분히 가라앉은 푸른 음영에는 사색과 고독의 정서를 배게 했다. 이처럼 공간의 물리적 깊이는 곧 감정의 층위가 되며, 거리의 멀어짐은 심리적 여백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이훈정 作_숲_WAY_50.5 x 40.5cm_oil on canvas_2025

결국 내가 구현하는 숲은 정지된 풍경이 아니라, 지리산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거대한 공기의 숨결을 포착한 감성적 공간이다. 나이프 끝에서 거칠게 밀려 나간 푸른 색면들은 층층이 쌓인 공간의 입체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나의 사유를 화면 속에 은은히 스며들게 한다.

특히 채도 높은 전경의 색채들은 땅 위에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화합하는 생명들의 뜨거운 맥박이다. 작위와 무작위가 교차하는 화면 속에서 색채들은 충돌하고 스며들며 자연의 역동적인 질서를 새롭게 형상화한다. 이는 단순히 먼 곳을 흐릿하게 그리는 기법적 선택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자연의 흐름에 나를 온전히 내맡기는 능동적인 순응의 표현이기도 하다.

나의 작품 속에서 소리와 침묵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공명한다. 그 울림이 관람객의 감각을 두드려 새로운 생명의 리듬을 선사하길 바란다. 대지가 내뿜는 기운과 하늘이 맞닿는 그 경계에서, 나의 예술이 살아 움직이는 자연의 서사시로 완성되기를 꿈꾼다.

로컬세계 / 이태술 기자 sunrise12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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