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특집 칼럼] 말의 영토가 오염될 때, 국격의 경계도 무너진다
한상면 기자
samhan38@naver.com | 2026-10-07 16:03:02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우리는 또다시 한글날을 맞이한다. 한글은 세계 문자사에서 유일하게 창제자와 창제 연도, 그리고 그 원리가 명확히 기록된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펴내며 밝힌 핵심은 단 하나,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憐憫)’과 ‘뜻을 서로 통하게 하고자 하는 소통(疎通)’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언어 지형을 들여다보면, 세종이 한글을 만든 그 숭고한 정신은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치가 써 내려가는 언어는 소통과 치유의 도구가 아니라 상대를 찌르는 날 선 무기가 되었고, 미디어 환경의 변질 속에서 공론장의 언어 영토는 심각하게 오염되어 가고 있다.
패륜의 역사에서 추임새로… 탈색된 비속어와 정제되지 않은 권력
언어학적으로 욕설이나 비속어의 변천사를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예컨대 우리가 일상에서 좌절이나 분노를 표출할 때 쓰는 ‘씨발’ 같은 강한 욕설은, 그 어원을 따져보면 조선 시대의 유교적 가부장제와 성적 금기, 그리고 패륜적 저주에서 비롯된 거친 말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구체적인 모욕의 맥락은 탈색되고 단순한 감정의 추임새나 감탄사로 자리 잡았지만, 그 뿌리에는 인간의 가장 깊은 금기와 치부를 건드리던 독성이 깔려 있다.
문제는 민의를 대변해야 할 정치인들이 저잣거리의 거친 입말과 사석의 독설, 상대를 낙인찍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공적 무대로 거리낌 없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의 의회 정치를 보면, 의원들은 완곡어법과 위트 속에 뼈 있는 비판을 담아낸다. 반면 한국 정가를 흔든 갖가지 핫마이크(Hot Mic) 파문과 정적을 향한 대중적 '사이다' 폭언들은 잠시 동안의 청량감을 줄지언정, 우리 사회의 언어적 토양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도파민 경제'와 미디어 생태계, 언론의 윤리를 잃은 준언론인들
더욱 심각한 것은 유튜브를 비롯한 뉴미디어 플랫폼에서 활개 치는 크리에이터들의 언어다. 오늘날 수많은 유튜버와 일명 '사이버 렉카'들은 사실상 '준언론인'의 위치에서 대중의 여론을 형성하고 알 권리를 대변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들이 구사하는 언어의 수위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자극적이고 파괴적이다.
조회수와 구독자 수가 곧 돈이 되는 '도파민 경제' 속에서, 이들은 '검증되지 않은 억측', '인격 모욕적 낙인찍기', '극단적 폭언과 혐오 표현'을 여과 없이 쏟아낸다. 언론의 사명인 객관성과 공정성은 사라지고, 오직 분노를 자극해 수익을 창출하는 언어적 폭력만 남았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유튜버식 언어'와 '정치인의 언어'가 악순환의 고리로 결합했다는 점이다. 정치인들은 팬덤 정치를 위해 유튜버들의 자극적 어휘를 선거판으로 가져오고, 유튜버들은 이를 다시 재가공해 대중의 적개심을 부추긴다. 준언론인이라는 영향력만 누린 채 언론으로서의 윤리와 사회적 책임은 외면하는 이들의 언사는, 자라나는 세대의 언어관을 병들게 하고 민주적 공론장을 저급한 난장판으로 추락시키고 있다.
언어 생태계의 말은 문화영토이다… 소통과 치유의 레토릭을 회복하라
정치인과 미디어의 언어는 단순한 어휘의 문제가 아니다. 언어 생태계의 말은 곧 문화영토이다. 눈에 보이는 국경선만이 영토가 아니라, 한 나라의 국민이 공유하는 언어의 수사학과 문화적 깊이가 바로 그 사회의 진짜 영토이자 국격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단죄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배제의 언어, 편 가르기를 위한 자극적인 멸칭, 그리고 돈과 표를 위해 쏟아내는 혐오의 언어는 국민의 불신을 극대화하고 문화영토의 경계를 스스로 허무는 결과를 초래한다. 절제되고 정교한 언어는 결코 약함의 표시가 아니다. 상대의 논리와 오류를 명확히 짚어내면서도, 인격과 신체를 모욕하지 않는 지적 위트와 절제야말로 진정한 언어의 내공이자 국격이다.
한글날을 맞아 로칼세계 독자들과 함께 언어의 본질을 되새겨본다. 차기 정치 리더들과 미디어 공간을 채우는 이들에게 바라는 언어적 자각은 명확하다.
첫째, '진영과 상업주의의 언어'에서 '통합과 책임의 언어'로 전환하라. 상대를 굴복시키고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흉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과 갈등을 엮어내는 다리로서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둘째, '준언론인'으로서 유튜버들과 뉴미디어는 언어적 윤리의식을 회복하라. 조회수를 위해 혐오를 파는 언어적 폭력을 중단하고, 영향력에 비례하는 사회적 책임을 무겁게 자각해야 한다.
셋째, 세종의 '애민(愛民)'과 '소통'의 초심으로 돌아가라. 글자를 몰라 제 뜻을 펼치지 못하던 백성을 아꼈던 그 마음처럼, 우리의 언어는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보듬고 공동체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따뜻한 온기를 품어야 한다.
말의 영토가 바로 서야 생각이 바로 서고, 생각이 바로 서야 나라의 품격이 올라간다. 이번 한글날이 정치권과 뉴미디어가 품고 있는 언어의 먼지를 털어내고, 세종이 선물한 위대한 한글에 걸맞은 '품격의 수사학'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상면 대표기자(칼럼니스트 / 영토학자)samhan3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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