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호르무즈의 안개 

로컬세계

local@localsegye.co.kr | 2026-04-20 14:01:10

국가 정비로 불안 걷어내야 박범철 작가

미국은 압도적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이제 더 이상 일관된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파수꾼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대신 자국의 위기 대응 시스템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란과 미국의 군사적 충돌이 호르무즈 해협의 불꽃으로 번졌다. 세계 원유 유동량의 20%, 대한민국 원유 도입량의 70%가 통과하는 이 좁은 생명선은 이제 우리 경제를 죄는 올무가 되었다. 에너지 수급에 가해진 유례없는 충격으로 3%를 상회하던 성장률 전망치는 이미 1.9%대로 곤두박질쳤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것은 일시적 불안이 아니다. 전후 한국 경제를 지탱해온 안보와 번영의 전제가 통째로 흔들리는 지정학적 대격변이다.

첫째, 경제 안보는 방어가 아닌 생존의 총력전이다. 유가가 10% 오를 때마다 우리 제조업의 원가 부담은 연간 8조 원씩 가중된다. 카타르발 헬륨 공급 차단으로 반도체 라인이 멈춰 설 위기에 처한 것은 거대한 재앙의 서막일 뿐이다. 정부와 기업은 핵심 소재 비축량을 즉각 120일분 이상으로 확충해야 한다. 단순한 수입선 다변화를 넘어 공급망 자립에 사활을 걸어야 할 때다. 위박한 상황 속에서도 정쟁에 매몰되어 공급망 관련 법안조차 표류시키는 정치권의 직무유기는 훗날 역사의 죄과로 기록될 것이다. 주유소 가기가 겁난다는 서민의 탄식과 공장 가동 중단을 걱정하는 기업인의 절규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둘째, 에너지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조해야 한다. 곡돌사신(曲突徙薪), 즉 굴뚝을 구부리고 땔나무를 옮겨 화근을 미리 제거하는 지혜가 절실하다. 언제든 봉쇄될 수 있는 해협에 국가의 운명을 통째로 맡기는 시대는 끝났다. 중동 의존도를 영구적으로 낮추기 위해 미국과 북해 등으로 수입선을 다각화하고, 해상 운송의 한계를 넘어서는 제3의 공급망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자원 확보와 기술 통제, 그리고 탄탄한 공급망 시스템 구축으로 나아가야 한다. 국내 자원 재활용률을 높여 원자재 의존도를 낮추고, 재생 에너지를 획기적으로 확대하여 자립 기반을 공고히 해야 한다. 나아가 원자력과 수소 경제로의 전환은 이제 환경 담론을 넘어선 국가 생존의 문제다. 화석 연료에 저당 잡힌 경제 체질을 바꾸는 에너지 대전환을 국정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 원전 생태계를 복원하고 에너지 주권을 확보하는 것만이 속국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셋째, 동맹은 굳건히 하되 외교는 실리적 자율성의 극치를 보여야 한다. 미국은 호르무즈 파병이라는 동맹의 청구서를 내밀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수용은 위험하다. 우리 유조선의 안전을 실질적으로 담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향후 중동 재건 시장에서의 기회비용 또한 막대하기 때문이다. 안보는 한미동맹을 축으로 하되, 경제와 에너지 영역에서는 국익을 절대 가치로 두는 K-실용주의 노선을 견지해야 한다.

단순한 군사적 기여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인도주의적 구호나 해상 치안 유지 등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독자적 영역을 설정함으로써 동맹의 의무와 국익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나아가 일본, 대만 등 유사 입장국과 연대하여 에너지 구매 협상력을 높이고, 국제 사회에 해상 통로의 자유를 강력히 요구하는 다자 외교의 기민함이 필요하다. 중동 국가들과 쌓아온 신뢰 자산을 활용해 중재자적 입지를 확보하는 등 다각적인 외교 레버리지를 가동해야 할 시점이다.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는 준비되지 않은 국가에겐 재앙이지만, 체질 개선에 성공한 국가에겐 도약의 기회가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적 재난을 국가 개조의 동력으로 승화시키려는 냉철한 전략가적 시선이다. 정부의 기민한 행정, 정치권의 초당적 결단, 산업계의 기술 혁신이 결집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안개 속을 헤맬 수밖에 없다. 시간이 없다. 위기는 이미 거실 안쪽까지 들어와 있다. 이제 국가 지도부의 결단이 답할 차례다.

박범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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